공학도지만 글도 쓰고 싶어/리튼바이

비가역

자네트 2020. 3. 21.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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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길게 느껴지진 않았어요. 세 번의 겨울을 보내는 동안에 난 어쩌면 행복했어요.

 

그날을 잊을 수 없어요. 하나부터 열까지 우리가 함께 고른 것들로만 가득한 이 방에 우리 마침내 영원을 약속하고 들어온 날. 영화처럼 귀에 팡파르가 울리고 햇살은 내리쬐던 날. 모든 것이 축복이고 모든 것이 시작인 줄 알았던 날.

 

당신은 나를 사랑했고 내 몸 또한 사랑해서 시시때때로 나를 만지고 같이 있으려 안달을 했죠. 난 나를 사랑하는 당신을 사랑했고, 행복한 당신의 모습을 사랑했었고.

 

침대 매트리스부터 휴지통 하나에 이르기까지 우리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이 방에서 우리 영원할 거라 생각했던 건 철없는 오만이었을까요

 

편히 누워 맘껏 잠을 청할 수 있도록 샀던 킹사이즈의 침대는 어느샌가 등을 돌린 우리가 살을 맞대도 되지 않을 여유로운 공간을 만들고 있었고

 

살찌고 씻지 않은 보통의 모습에도 웃음을 터트리며 볼을 꼬집고 놀았던 우리는 어느샌가 맞지 않는 옷과 처진 옆구리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됐고

 

언제나 내 편일 줄 알았던 당신은 내게 공감하지 못했고 당신은 귀엽게만 느꼈던 내 투정을 귀찮게 느끼기 시작했고

 

모두가 그렇게 된대도 우리만은 아닐 거라 믿었던 모습이 우리 인생에도 흔하게 재생되고 있었죠.

 

넓고 쾌적한 방은 공허하고 차가운 공간으로 바뀌었고 우리는 서로를 보며 웃는 일이 없어졌어요. 등을 돌린 모습이 자연스러웠고 각자 잠드는 시간은 언제나 달랐어요. 몸에 안 좋다며 마시지 말라고 했던 술에 잔뜩 취해 들어온 모습에도 우린 서로에게 아무런 잔소리를 하지 않았었죠. 다들 이렇게 산다 자위하려 하지만 나는 가끔 울었어요. 욕실을 전세 냈냐며 당신이 신경질 내던 그 시간. 나는 당신의 따뜻했던 품이 떠올라 주저앉아 울었어요.

 

이건 어느 한쪽의 잘못도 아니란 걸 알아요. 그저 우리의 사랑이 서로 예전 같지 못했을 뿐. 사랑으로 이해하며 품어온 균열들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 용인할 수 없게 된 것일 뿐.

 

이 방이 이리도 넓었나요. 이리도 고요했나요.

수많은 추억과 장면들이 나를 오늘까지 붙잡아왔지만 결국 깨닫고야 말았네요.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과거의 기억 속 우리일 뿐. 지금의 당신과 나는 예전의 그들이 아니라는 걸.

 

끝내 당신과 나, 지쳐 나가떨어져 마지막을 고할 때까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죠

아무도 탓할 수 없어요

내 선택으로 이룬 자리니까요

추억만을 담고 가기로 했어요,

이젠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에 더 소중했던 그 때를.

 

 

 

난 오늘 이 방을 떠나요.

우린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거예요.

 

 

 

 

 

 


첫 만남, 첫 기억을 소재로 한 픽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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