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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학도지만 글도 쓰고 싶어/리튼바이 6

비가역

그리 길게 느껴지진 않았어요. 세 번의 겨울을 보내는 동안에 난 어쩌면 행복했어요. 그날을 잊을 수 없어요. 하나부터 열까지 우리가 함께 고른 것들로만 가득한 이 방에 우리 마침내 영원을 약속하고 들어온 날. 영화처럼 귀에 팡파르가 울리고 햇살은 내리쬐던 날. 모든 것이 축복이고 모든 것이 시작인 줄 알았던 날. 당신은 나를 사랑했고 내 몸 또한 사랑해서 시시때때로 나를 만지고 같이 있으려 안달을 했죠. 난 나를 사랑하는 당신을 사랑했고, 행복한 당신의 모습을 사랑했었고. 침대 매트리스부터 휴지통 하나에 이르기까지 우리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이 방에서 우리 영원할 거라 생각했던 건 철없는 오만이었을까요 편히 누워 맘껏 잠을 청할 수 있도록 샀던 킹사이즈의 침대는 어느샌가 등을 돌린 우리가 살을 맞..

집에 가고 싶다

집이라는 공간에 큰 애정을 붙인 적이 없다. 유년 시절 울산 2년. 서울 2년. 충청도에서만 이사 네 번. 기숙사 1년. 자취 2년. 자취 중 이사 한 번. 다시 서울 올라와 자취 2년 차. 그사이에 이사 한 번. 누군가에겐 적고 누군가에겐 많겠지만 적어도 나한테는 잦은 이사였다. 일이 년에 한 번씩 이사 다니는 것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한 집에 가장 오래 살았던 게 10년 정도인가보다. 딱 초등학교 중학교 다닐 시절. 그동안 혼자만의 방을 가질 수 있었던 건 자취할 때뿐이었다. 그 외에는 동생과 계속 한방을 썼었고 지금도 본가에 가면 동생과 방을 같이 쓴다. 기숙사는 4인 1실이었고 지금도 룸메(?) 집에 얹혀살고 있고, 그나마 고등학생 때 2년 자취할 때도 1년 정도는 룸메이트가 있었으니, 내 인생에..

The Color : 두려워하는 것

나는 아주 자주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지만 나는 아무래도 평균 이상으로 자주 죽음을 떠올리는 것 같다. 어제 퇴근하는 길 집 앞에서 하늘을 보면서도, 며칠 전 회사 비상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언젠가 지하철 손잡이의 감촉을 느끼면서도, 또는 그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면서도. 그럴 때 나는 나의 온갖 감각에 이질감을 느끼며 배와 명치 사이 어딘가가 일그러지는 느낌을 받는다. 손바닥 안의 차가운 금속의 느낌, 흔들리는 발밑의 지하철 바닥, 지하철이 달리며 내는 시끄러운 금속음, 핸드폰 속 내게 말을 거는 누군가의 텍스트. 그 모든 것에 순간적인 거리감을 느낀다. 그리고 생각한다. 내 생각, 내 감정, 내 기억, 내 능력, 모든 게 아무 의미도 없어지는 날이 오겠지. ..

영화처럼 눈 내리던 날

눈이 내려 우리 서로 어쩔 줄 모르던 날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에 웃음을 터트리고 둘 사이 십 센치 틈, 그 공백을 메운 어지러운 향기 나는 그 간격이 참 멀었지 세상에서 가장 간지러운 비밀 날 좋아한다고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머리 위로 내리는 눈이 그날은 어쩐지 따듯했지 발자국이 남은 소복한 눈길 위 우리 둘 흔적이 퍽 다정해서 여기서 네가 날 껴안아줘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우리 머리가 핑 돌았던 날 춤을 췄지 눈이 차분하게 쌓인 장면 안에 오직 우리만 따스하게 걸었어 뽀얀 입김이 허공에 얼어붙어 내려도 우리 눈빛은 따뜻하게 녹아내려 나는 절로 춤을 췄었지 여기서 네가 날 사랑한다고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시간을 멈추고 싶었던 날 한 때 눈이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 모든 걸 ..

우는 여자

“저……오늘이 마지막이에요.” 여자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아, 그래요. 남자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여자 앞에 놓인 찻잔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여자의 한쪽 손끝은 규칙적으로 테이블을 약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여자의 눈빛에는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 “언제 출발하시죠?” “내일 이른 아침이에요.” “오늘도 곧 들어가셔야겠군요.” 마주 앉은 둘의 시선은 어쩐지 엇갈린 채였다. 남자는 그의 왼편, 그의 그리다 만 캔버스들이 놓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고 여자는 앞에 놓인 찻잔만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왔어요, 오늘은.” 여자는 한번 숨을 고르고 말했다. 그들의 대화는 간격을 들여 느릿하게 이어졌다. 약간의 침묵과, 흔들리는 눈빛에서 나오는 묘한 긴장감이 그리 넓지 않은 ..

변하지 않는 것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에요. 온라인에서든 오프라인에서든 흔히 볼 수 있는 연애 상담의 답변에서 무조건 볼 수 있는 말이다. 제발 헤어지라면 헤어져… 제발 방생하지 말고 결혼해라… 뭐 그런 댓글들의 일환으로. 나 또한 원래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쪽에 공감하는 편이었는데, 얼마 전에 미친 듯이 그 말을 실감하게 되는 일이 있었다. 내 어린이집 생활기록부(?)를 발견한 것. 일곱 살 때였던 것 같은데 아마. 우스운 부분이 몇 군데 있었다. 묻는 말에 바르게 대답, 발표력 뛰어남. 오랜 시간 집중은 하지 못한다. 받아쓰기는 완벽하다. 옷차림은 단정하나 자기 물건(가방, 옷) 정리가 아쉽다. 무엇이든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 소꿉놀이보다 블록놀이에 더 열중이다. 가끔 다른 친구의 활동에 방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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