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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학도지만 글도 쓰고 싶어 9

오래된 것이 가지는 힘

추억팔이라는 건 흐릿해져서 멀어져만 가는 것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어린 날의 그것들 하루하루 지나갈수록 하루하루 잊혀져가는 것들 그래서 가끔씩은 아, 그것들이 전부 꿈은 아니었을까 나만 잊어버리면 사라져버릴 것들은 아니었을까 그런 의문이 들 정도로 희미한 것들을 그래, 거기에 있었지 더듬더듬 기억을 되짚어서 하나 둘 증거를 찾을 때 그건 꿈이 아니었구나 정말 존재했었구나 나는 거기에 정말로 있었구나 나만 기억하던 게 아니구나 그렇게 희열을 느끼게 해서 자꾸만 자꾸만 몇 번이고 들여다보게 하는 것 돌아갈 수 없지만 분명히 자국은 남았을 것이라 믿게 하는 몸부림인 것일지도 모른다

MBTI가 바뀌기도 하나요? (MBTI에 관한 오해들)

필자는 MBTI 유료 정식검사 결과 각 특성(N, T, P)에 대한 선호성이 굉장히 강한 ENTP임을 먼저 밝혀둔다. (흥미를 가진 것에 진지하게 파고드는 것부터가 극단적인 엔팁들은 공감이 될 것이다. 각 특성이 중간에 걸친 사람들은 그다지 공감할 수 없을 것이고) 틀린 소리를 못 견디는 엔팁들은 필자가 이런 글을 쓰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MBTI 유형은 거의 만능인 것처럼 퍼져 있으며 잘못된 상식이 온갖 유튜브와 인스타 등에 떠돌아다닌다. MBTI 유형으로 궁합을 점치려 하며 어떤 사람을 전부 판단하려 하기도 하고 같은 유형인 사람은 성격이 똑같다고 여기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물론 비슷한 심리 기능을 쓰는 사람들이 모이면 어느 정도 공통된 경향성이 나오는 것은 맞다. 하지만 너무나..

믿는 구석

개인이 자신의 삶을 행복하다고 여기게 하는 조건에는 수많은 것이 있겠지만 이번에는 내가 요즘 가장 크게 느끼는 행복의 조건이 어떤 건지 써내려가보려고 한다. 최근 나를 붙잡아 주는 것, 지지해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돈이 뭐가 중요하냐들 말하곤 하지만 사실 일정 수준 이상의 안정적인 소득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 아주 최적일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 먹고 살기 힘든데 사람이 행복을 쉽게 느낄 수 있을 리가 없다. 다만 주의할 것은 저 사람이 나보다 열 배의 수입을 번다고 해서 저 사람이 나보다 열 배 더 행복하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이 내용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연구한 결과가 나와있다. 이 글에서 소득과 행복의 상관관계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이 기사에서 ..

비가역

그리 길게 느껴지진 않았어요. 세 번의 겨울을 보내는 동안에 난 어쩌면 행복했어요. 그날을 잊을 수 없어요. 하나부터 열까지 우리가 함께 고른 것들로만 가득한 이 방에 우리 마침내 영원을 약속하고 들어온 날. 영화처럼 귀에 팡파르가 울리고 햇살은 내리쬐던 날. 모든 것이 축복이고 모든 것이 시작인 줄 알았던 날. 당신은 나를 사랑했고 내 몸 또한 사랑해서 시시때때로 나를 만지고 같이 있으려 안달을 했죠. 난 나를 사랑하는 당신을 사랑했고, 행복한 당신의 모습을 사랑했었고. 침대 매트리스부터 휴지통 하나에 이르기까지 우리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이 방에서 우리 영원할 거라 생각했던 건 철없는 오만이었을까요 편히 누워 맘껏 잠을 청할 수 있도록 샀던 킹사이즈의 침대는 어느샌가 등을 돌린 우리가 살을 맞..

집에 가고 싶다

집이라는 공간에 큰 애정을 붙인 적이 없다. 유년 시절 울산 2년. 서울 2년. 충청도에서만 이사 네 번. 기숙사 1년. 자취 2년. 자취 중 이사 한 번. 다시 서울 올라와 자취 2년 차. 그사이에 이사 한 번. 누군가에겐 적고 누군가에겐 많겠지만 적어도 나한테는 잦은 이사였다. 일이 년에 한 번씩 이사 다니는 것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한 집에 가장 오래 살았던 게 10년 정도인가보다. 딱 초등학교 중학교 다닐 시절. 그동안 혼자만의 방을 가질 수 있었던 건 자취할 때뿐이었다. 그 외에는 동생과 계속 한방을 썼었고 지금도 본가에 가면 동생과 방을 같이 쓴다. 기숙사는 4인 1실이었고 지금도 룸메(?) 집에 얹혀살고 있고, 그나마 고등학생 때 2년 자취할 때도 1년 정도는 룸메이트가 있었으니, 내 인생에..

The Color : 두려워하는 것

나는 아주 자주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지만 나는 아무래도 평균 이상으로 자주 죽음을 떠올리는 것 같다. 어제 퇴근하는 길 집 앞에서 하늘을 보면서도, 며칠 전 회사 비상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언젠가 지하철 손잡이의 감촉을 느끼면서도, 또는 그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면서도. 그럴 때 나는 나의 온갖 감각에 이질감을 느끼며 배와 명치 사이 어딘가가 일그러지는 느낌을 받는다. 손바닥 안의 차가운 금속의 느낌, 흔들리는 발밑의 지하철 바닥, 지하철이 달리며 내는 시끄러운 금속음, 핸드폰 속 내게 말을 거는 누군가의 텍스트. 그 모든 것에 순간적인 거리감을 느낀다. 그리고 생각한다. 내 생각, 내 감정, 내 기억, 내 능력, 모든 게 아무 의미도 없어지는 날이 오겠지. ..

영화처럼 눈 내리던 날

눈이 내려 우리 서로 어쩔 줄 모르던 날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에 웃음을 터트리고 둘 사이 십 센치 틈, 그 공백을 메운 어지러운 향기 나는 그 간격이 참 멀었지 세상에서 가장 간지러운 비밀 날 좋아한다고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머리 위로 내리는 눈이 그날은 어쩐지 따듯했지 발자국이 남은 소복한 눈길 위 우리 둘 흔적이 퍽 다정해서 여기서 네가 날 껴안아줘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우리 머리가 핑 돌았던 날 춤을 췄지 눈이 차분하게 쌓인 장면 안에 오직 우리만 따스하게 걸었어 뽀얀 입김이 허공에 얼어붙어 내려도 우리 눈빛은 따뜻하게 녹아내려 나는 절로 춤을 췄었지 여기서 네가 날 사랑한다고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시간을 멈추고 싶었던 날 한 때 눈이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 모든 걸 ..

우는 여자

“저……오늘이 마지막이에요.” 여자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아, 그래요. 남자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여자 앞에 놓인 찻잔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여자의 한쪽 손끝은 규칙적으로 테이블을 약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여자의 눈빛에는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 “언제 출발하시죠?” “내일 이른 아침이에요.” “오늘도 곧 들어가셔야겠군요.” 마주 앉은 둘의 시선은 어쩐지 엇갈린 채였다. 남자는 그의 왼편, 그의 그리다 만 캔버스들이 놓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고 여자는 앞에 놓인 찻잔만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왔어요, 오늘은.” 여자는 한번 숨을 고르고 말했다. 그들의 대화는 간격을 들여 느릿하게 이어졌다. 약간의 침묵과, 흔들리는 눈빛에서 나오는 묘한 긴장감이 그리 넓지 않은 ..

변하지 않는 것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에요. 온라인에서든 오프라인에서든 흔히 볼 수 있는 연애 상담의 답변에서 무조건 볼 수 있는 말이다. 제발 헤어지라면 헤어져… 제발 방생하지 말고 결혼해라… 뭐 그런 댓글들의 일환으로. 나 또한 원래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쪽에 공감하는 편이었는데, 얼마 전에 미친 듯이 그 말을 실감하게 되는 일이 있었다. 내 어린이집 생활기록부(?)를 발견한 것. 일곱 살 때였던 것 같은데 아마. 우스운 부분이 몇 군데 있었다. 묻는 말에 바르게 대답, 발표력 뛰어남. 오랜 시간 집중은 하지 못한다. 받아쓰기는 완벽하다. 옷차림은 단정하나 자기 물건(가방, 옷) 정리가 아쉽다. 무엇이든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 소꿉놀이보다 블록놀이에 더 열중이다. 가끔 다른 친구의 활동에 방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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