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에요.
온라인에서든 오프라인에서든 흔히 볼 수 있는 연애 상담의 답변에서 무조건 볼 수 있는 말이다. 제발 헤어지라면 헤어져… 제발 방생하지 말고 결혼해라… 뭐 그런 댓글들의 일환으로.
나 또한 원래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쪽에 공감하는 편이었는데, 얼마 전에 미친 듯이 그 말을 실감하게 되는 일이 있었다. 내 어린이집 생활기록부(?)를 발견한 것. 일곱 살 때였던 것 같은데 아마. 우스운 부분이 몇 군데 있었다.
묻는 말에 바르게 대답, 발표력 뛰어남. 오랜 시간 집중은 하지 못한다.
받아쓰기는 완벽하다.
옷차림은 단정하나 자기 물건(가방, 옷) 정리가 아쉽다.
무엇이든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
소꿉놀이보다 블록놀이에 더 열중이다.
가끔 다른 친구의 활동에 방해가 되는 행동을 한다.
활동에 참여하려는 의욕이 강하다.
노래 부르기와 율동을 매우 좋아하며 창의적인 활동에 뛰어나다.
다른 친구의 생각을 이해하며 관계가 우호적이나 좀 더 많은 친구와 어울리는 기회를 만들어주면 좋겠다.
아 이거 완전 나잖아?
놀랍게도 일곱 살 때의 나는 스물일곱 살의 나와 완벽히 일치한다. 단점이 세 개 적혀 있었는데, 오랜 시간 집중 못 함, 옷차림은 단정한데 물건 정리 아쉬움. 이십 년 동안에도 고쳐지지 않고 여전하다. 다른 친구를 왜 방해했는지는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마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하는 거야!” 하며 오지랖을 부렸지 않았나 추측해본다. 왜냐면 지금도 누가 뭔가를 잘 못하는 거 보면 답답하긴 하거든. 그래도 그건 크면서 맘속으로 조절하게 됐고, 오히려 누가 하기 전에 내가 맡아서 하는 편(답답한 거 못 보는 본성은 역시나 바뀌지 않음).
관계는 우호적이지만 그 반경은 좁은 것도 지금과 동일. 수많은 관계에 피로감을 느끼는 타입은 이미 일곱 살 때부터,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었던 모양.
저 기록은 지금 내 소개를 할 때 써먹어도 충분할 정도로 완벽한 나다. 그래서 난 더더욱 신빙성을 얻었다. 사람은 바뀌지 않고, 고쳐 쓰는 거 아니라는 말.
물론 변하는 것 또한 있다.
낯을 무척이나 가리지만, 가리지 않는 것처럼 노력하는 것.
낮아졌던 자존감을 회복하는 방법
삶을 바라보는 방식,
나를 사랑하는 사람과 상처 입히는 사람을 대하는 방법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
타인을 위해 내가 감내해야 하는 한계치
더 다양한 것들로부터 행복을 느끼는 방법
기타 등등.
아니 그러면 사람은 바뀔 수 있는 거 아니에요? 할 수 있다. 그러나 변한 것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들이 바뀌는 것이지, 내가 감정을 “받아들이는 기준”은 없다. 일곱 살 때나 지금이나 나를 사랑에 빠지게 하고, 나를 기쁘게 하고, 나를 상처 입히는 것들의 본질은 변한 적이 없다. 내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 내가 떳떳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기준도 바뀐 적 없다.
신체도 머리도 크고 나이 들며 그에 따른 것들은 지금도 바뀌고 있다. 타인도 나와 똑같이 아픔을 느낀다는 깨달음, 내 화를 다스리는 법, 입맛, 여행 스타일, 활동적인 취미에서 정적인 취미로 옮겨오는 것처럼.
그러나,
나를 울게 하는 것.
내가 그리워하는 것.
사랑을 느끼는 방법.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
인간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
여행을 떠나서 얻고자 하는 것.
책임이란 말에 느끼는 무게감.
내가 하고 싶은 건 해야 하는 고집.
그런 사고방식들은 바뀌기 어렵다.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삶이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고꾸라지지 않는 이상, 나는 바뀔 수 없다고 생각한다(언제나 예외는 존재하지만, 극히 드물다).
그러니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들 하는 것이다. 남들에게 상처를 주며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그 기준이 수십 년째 굳어있던 셈이다. 남들을 깎아내리거나, 가학적으로 조종하거나, 다수의 관심을 필요로 하거나, 남이 어떻게 되든 말든 자신만 좋으면 되는 그런 기준들. 수십 년 동안 그 사람을 지탱해 온 기둥 같은 것이, 다른 사람의 희생 같은 것으로 바뀔 리 없다. 나조차도 이십 년 동안 바뀌지 못했다. 앞으로 남은 몇십 년은 어떨까? 나는 내가 바뀌지 않을 거라 믿는다. 절대로. 참고 살거나 바꾸려 노력할 수는 있어도 본성은 바꿀 수 없다.
그럼에도 그 노력을 높이 사서 한 번 만나보면 어떨까요.
나 또한 한 때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본성”이 바뀌지 않는 사람을 곁에 둬본 적이 있으므로, 감히 대답할 것이다.
지팔지꼰이라는 말이 있죠. 자기 팔자 자기가 꼰다고.
변하는 것은 보통 변하지 않는 기준을 어떤 식으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누구나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이 있을 것이고, 기준 없이 사는 사람도 그 자체가 그 사람의 기준인지도 모르고.
완전히 잊고 있던 이십 년 전의 기록으로 불현듯 적어 내려오는데, 또 마침 최근 주변 상황과도 맞물려서 꼭 혼내는 글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정말이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꼭 말해주고 싶은 내용이다. 사람을 볼 때는 변하지 않는 것을 보라고. 정말이야. 난 이걸로 잘 찾아냈다니까. 변하지 않는 것이 사랑스러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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